백자는 사용자의 필요와 취향, 문화를 반영한 조선시대 사대부가 쓰던 그릇이다. 순수 미술이 아닌 생활 미술품, 쓰임이 좋은 그릇이자 라이프스타일이 담겨 있다는 의미다. 우리가 보물처럼 두고 감상하는 달항아리도 본래 보관용 항아리였다. 오늘, 조선백자의 가치를 되짚어 백자를 만들고 그 그릇에 음식을 담아 흡족하게 쓰는 이야기를 들어본다.
<음식 담는 최고의 그릇, 백자>
최지은은 요리연구가이자 일본에 우리 문화를 알리는 문화코디네이터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90년대 일본을 오가며 백자에 눈떴다. 당시 일본 사람들이 골동품상을 뒤져 조선백자를 하나씩 사서 모으며 보물처럼 애지중지하였다. “20여 년 전 일본에서 요리책을 낼 때 마땅한 그릇이 없어 애를 먹었어요. 우리 음식은 양념이 강해서 알록달록한 일본 그릇이 어울리지 않았어요. 옹기는 본래 보관용이기도 하고, 음식을 담으면 색이 제대로 살지 않더군요.” 당시 광주요, 우일요 등 도자기 브랜드가 있었는데 우일요 김익영 선생이 사명감을 가지고 생활 백자를 만들었고, 광주요는 주로 분청 그릇을 생산했다. 분청은 자유분방하고 편안한 맛이 있지만 음식을 담았을 때 돋보임이 덜했다. 요리책 출간을 계기로 최지은 선생은 백자 그릇을 찾아 다녔고, 일본 잡지에 우리나라 작가들의 백자를 소개하는 칼럼을 연재하기도 했다.
청화 백자에 담은 호박선, 이세용작가
사발에 국도 담고, 과일도 담고
최지은 선생은 사계절 백자를 쓴다. 백자는 흰색이어도 공장에서 찍어낸 흰 그릇과는 달리 색감이 달라 질리지 않고, 디자인이 미니멀해서 무엇을 담아도 어울림이 좋다. 매화, 모란 등 문양이 들어간 백자도 종종 섞어 쓴다. 최지은 선생이 가장 쓰임이 좋은 그릇으로 꼽은 것은 사발이다. 사발은 국, 갈비찜, 김치를 담아도, 체리나 망고, 초콜릿 등 서양 음식을 담아도 모두 어울린다. 메인 메뉴부터 디저트까지 두루 소화하는 그릇이다. 최지은 선생이 사발에 가득 담아낸 가지찜이 참으로 먹음직스럽다. 상차림을 보니 김을 컵에 꽂아내기도 하고, 제기처럼 생긴 굽 접시에 과일을 올리기도 하는 등 발상이 신선한데 그의 말처럼 모두 제짝에 담은 듯 보기 좋다. 담음새가 좋고 음식을 잘하는 사람들이 최고로 꼽는 그릇이 백자이지만 무엇을 어떻게 담아도 두루 어울리기에 누구나 써 볼만한 그릇이기도 하다.
사발에 담은 찐 가지, 이기조 작가
무를 덮어 찐 전복, 이세용 작가
백김치, 이기조 작가
판 접시에 올린 청포도, 김상인 작가
사발에 담은 체리, 이기조 작가
손님 초대 상에 백자를 쓰다
백자에 탐닉하던 요리연구가의 스튜디오에는 여러 작가의 백자 그릇이 가득하다. 사발과 접시뿐 아니라 술병, 찻잔 층층이 열리는 사각함, 모던한 라인의 꽃병 등 종류도 다양하다. 궁중요리를 공부한 그는 음식을 담았을 때 가장 돋보이는 그릇이 백자라고 단언한다. 귀한 손님을 대접할 때도 백자로 상을 차린다. 백자는 은과 유리와 함께 놓으면 그 우아함이 돋보여 은수저와 유리잔을 챙긴다. 높이가 있는 굽 접시 등을 섞어 차리면 꽃병이나 촛대 없이도 테이블에 높낮이가 생겨 정갈하면서도 다채롭다.
<백자, 시대와 함께 숨쉬다>
해인요 전시장에는 고족(높은 다리)접시와 작은 소반 등 이제껏 보지 못했던 모양의 생활 백자가 있다. 김상인 작가의 백자는 단정하고 곱상하다. 젊은 작가는 강원도 소반, 구름 문양, 제기 등 조선의 디자인을 유연하게 접목했다. 매화, 누비 등 전통 문양을 넣은 그릇들도 현대적이다.
대학에서 조형 작업을 하고 이기조 작가 작업실에서 수련한 그는 처음에는 백자의 아름다움을 체감하지 못했다. 그저 좋다니 좋은 줄 알았는데 어느 시점에 백자가 지닌 조형미가 보였다. 일본과 중국, 서양의 도자기는 그림을 그리고 장식을 붙여 꾸미나 우리 백자는 조형미를 기본으로 한다. 조형만 떼어 두고 보아도 중국 것은 기술로 완벽하게 떨어지는 것은 추구한 반면 조선백자는 힘을 빼고 철학이 담긴 조형이다. 화려한 고려청자의 역사가 있었으니 조선의 도공이 실력이 없어 완벽하게 못 만든 것이 아니다. 그는 요즘 젊은 사람들이 백자 그릇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가 현대 문명에 물려 슬로 라이프, 미니멀리즘이 유행하는 덕분이 아닌가 한다. 조선백자가 고려의 위세를 마무리 짓고 절제된 정신문화에서 나온 산물이니 그 맥이 통하리라는 짐작이다.
감꽃님 작가의 포도 그림
흙물을 올려 표현한 매화 문양
식탁 위의 오브제
김상인 작가는 식탁 위의 오브제가 되는 백자를 고민했다. 테이블에 화병과 촛대를 올리는 요즘 사람들의 생활을 염두에 두고, 초창기에는 다과상에 올라갈 그릇을 만들었다. 작은 소반은 약소반의 형태를 작게 줄여 접시로 만든 것이다. 그릇에 뚫어 넣은 운문(구름모양)은 강원도 소반에서 상을 높이 들고 앞을 보도록 뚫은 디자인에서 영감을 받았다. 고족접시는 조선중기까지는 제기로 쓰였는데 중기 이후에는 생일상이나 귀한 손님을 대접할 때 썼기에 접시와 잔에 굽을 넣어 만들었다. 작가의 의도대로 해인요 백자로 차린 다과상은 백자의 기품과 함께 아기자기 재미가 있다.
해인요에서 그림을 담당하는 감꽃님 작가 이야기를 들어보면 백자의 매력을 짐작할 수 있다. 본래 알록달록한 서양 그릇을 즐겨 썼던 젊은이는 요즘은 가마가 열리는 날을 기다려 제 그릇을 챙긴다. 작업실에서 몇 년 식사를 하면서 백자에 담긴 음식의 미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느 겨울, 콩나물국을 끓여 백자 사발에 담았는데 콩나물 머리와 흰 줄기가 적절히 꼬여 있는 담음새가 참 예뻤다. 화려한 그릇에 담았을 때는 복잡하기 이를 데 없던 콩나물국이 그렇게 괜찮아 보이는 것이 신기했다. 그래서 해인요 인스타그램 (haeinyo)에는 봄이면 새파란 두릅, 여름이면 하얀 배를 동동 띄운 수박 화채 등 해인요의 ‘백자 생활’이 등장한다.
<젊은 작가, 선의 아름다움에 매료되다>
권은영의 도자기는 코르사주처럼 화려하다. 딸기와 과자, 커피를 담아 낸 모습이 제격인 젊은 디자인이다. 작가의 트레이드 마크인 뽀족한 가시는 식물의 가시에서 모티프를 가져왔다. 그런데 작가는 작품을 설명하면서 선의 아름다움을 말한다. 그의 화려한 도자기에는 정성을 기울여 매만진 선과 오래된 백자에서 본 분처럼 핀 꽃무늬가 숨어있다. “일본 도자기의 선은 얄미우리만큼 정교하고 중국은 기교가 많고 과감한 반면 우리나라의 선은 소박하고 자연스러워요. 첫눈에 숨죽이게 되는 백자 라인이 있어요.” 작가의 사발, 합, 접시, 잔은 유려하고 섬세한 선이 살아있다. 양념을 담는 작은 접시 하나도 끝선의 매무새가 정성스럽다.
도자기 실험실
1년 전 작업실을 연 젊은 작가는 탐험하듯 매번 다른 모양의 도자기를 빚는다. 작업실 선반의 작은 항아리와 와인 잔의 배부른 정도, 굽의 모양이 모두 다르다. 마치 실험을 하듯 물레를 차고 깎아낼 때 선의 느낌을 살리며 최상의 라인을 찾는다. 작가가 백자 흙을 선호하는 것도 입자가 고와서 섬세하게 선을 살리기 좋아서다. 그의 백자는 노르스름한 빛이 감도는데 일부러 노란빛이 나는 유약을 쓴다. 전기가마를 쓰지만 가마의 온도를 조절해가며 노란빛의 정도를 조절한다. 이를 ‘꽃이 핀다’라고 표현하는데 가마 안에서 자연스럽게 변하는 색감이 좋아 마치 실험하듯 도자기를 만든다.
계란처럼 쏙 잡히는 와인잔
조선백자에서 따온 사발의 선
그릇도 그렇지만 와인 잔은 특히 잡았을 때의 느낌을 신경 쓴다. 계란처럼 손에 폭 들어오는 느낌 좋은 잔은 팔지 못하고 본인의 소장품으로 간직하고 있다. 마치 종이컵과 도자기 컵에 마시는 커피 맛이 다르듯 차가운 유리잔과 따스한 감촉의 도자기에 마시는 와인도 느낌이 다르다. 도자기를 쓰는 맛은 그런 것이다.
<조선백자의 멋>
이기조의 백자는 ‘적당하다’는 말이 어울린다. 어쩌면 이것은 백자를 설명하는 최고의 찬사일 수있다. 너무 예쁘거나 너무 위세 있지 않은 적당한 느낌이 무엇인지 도자기를 빚은 작가도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이는 백자의 맛이 어떤 형태나 설백이니 유백이니 하는 색감이 아니라 정신에 있기 때문이다. 한국미술사를 두고 봤을 때 조선은 도자기뿐 아니라 모든 문화가 현대 미술도 닿을 수 없는 정점의 시대였다. 작가는 조선백자가 맥이 끊겼는데 원류를 찾아 이어봐야겠다는 소명의식이 있었다. 수십 년 전 우연히 뜻있는 독지가를 만나 몇몇 도예가들이 백자를 공부할 기회를 가졌다. 일본의 고미술상, 우리나라 유명 박물관의 백자 컬렉션을 보았던 경험을 그는 백자에 관한 안목을 가지게 된 엄청난 시간이었다고 회상한다.
뒷면에 굽이 있는 전접시
“작가들은 사발 하나를 빚더라도 많은 선택의 과정을 거칩니다. 저는 그 기준을 조선백자에 둡니다. 어떤 문양이나 형태가 아니라 조선백자스럽다는 맛, 느낌이 있어요. 눈은 형태를 보고 있지만 감동을 주는 것은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느낌, 기운 이런 거에요.” 서양의 흰 도자기와 우리의 백자는 모두 흰 그릇이지만 다르다. 백자에는 포용력과 따스함, 자연스러움, 편안함이 있다. 조선의 도공들은 의도적으로 절제미를 드러내려고 빚은 것이 아니라 “내가 도자기를 빚고는 있지만 나의 비중은 얼마 안 되지”라는 자세로, 마치 추사가 명문을 위해 애쓰기보다 힘을 빼고 써 내려가듯이 빚었기에 그런 맛이 담기는 것이다.
보고 만지고 들어보라
20여 년 백자를 빚은 작가는 얼마 전 인사동의 허름한 가게에서 감탄하며 사왔다는 접시와 다완을 꺼내온다. 골동 접시는 접시 안쪽의 라인과 모양새가 작가가 만든 접시와 흡사하다. 작가의 설명을 들으며 골동 접시를 들어보고 접시 바깥 면에 있는 얇은 턱을 만져보았다. “이 턱이 있어서 접시를 잡았을 때 안정감이 생깁니다. 사용자를 생각한 조선백자의 디테일이에요.” 이기조 작가의 베스트셀러인 전접시도 그런 조선백자의 디테일이 담겨 있다. 접시 테두리의 끝에 얕은 턱이 안으로 곱게 말려들어가 있는데 바깥쪽은 둥글게 말리고 안쪽은 각이 살아있다. 뒷면은 계단처럼 굽이 있어 상에 놓았다가 들 때 편하고 손에 쥐었을 때는 아늑함이 느껴진다.
날렵하되 날카롭지 않고, 가벼우나 기품이 있는 신기함은 모두 조선백자에서 비롯된 것이다 “제 그릇을 쓰면서 설거지할 때 느낌이 너무 좋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어요. 백자의 맛을 아시는 거지요.” 그는 모든 음식, 라면도 물 한 잔도 백자에 담아 먹는다. 심지어 다른 컵에 주면 다시 옮겨 담아 마신다고 한다. 백자가 그렇게 좋다고 한다. 이 맛을 아는 방법은 그저 보고 쓰고 만지고 들어보는 것이라고 한다. 자신이 백자를 공부하며 도록을 보고 박물관에 가서 실물을 보고 기회가 닿을 때마다 만져보며 무던히 경험하던 어느 날 백자의 맛이 몸에 배인 것처럼 그리 되리라는 것.
<일상다반사, 차회 열던 날>
어느 추운 겨울밤, 종로구 통의동의 일상다반사에서 따뜻한 차회가 열렸다. “봄이 오는 겨울의 맛”이라는 시적인 제목의 차회는 매화차와 매실 한 쪽을 웰컴 티로 시작해 녹차, 황차, 동백차, 은행단자, 들깨 강정 등 우리 차와 음식을 나누는 일상의 여백 같은 자리였다. 격식을 중시하는 여느 차회와는 달리 시절에 맞게 준비한 차와 티 푸드, 대접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고, 여러 작가의 백자 그릇이 등장해 보는 즐거움을 더했다.
매화차와 매실장아찌
녹차 우전과 묵나물 만두, 김동준 작가
잣가루를 뿌린 은행단자와 황차, 이세용 작가
3가지 디저트와 유자병차, 김상인 작가
봄의 맛을 지닌 녹차 우전은 김동준 작가의 양쪽에 귀가 달린 모양의 양이잔에 고요히 따라졌고, 지난해 햇빛이 담긴 묵나물을 소로 넣은 나물 만두가 곁들여졌다. 두 번째로 나온 황차는 잣가루를 눈처럼 뿌린 은행단자와 냈다. 뜨겁게 마시면 몸에 좋다는 황차는 유난히 추웠던 올 겨울의 언 몸을 녹이듯 따끈했고, 이세용 작가의 분홍빛 매화가 가득 그려진 백자 접시는 봄을 기약하는 듯 붉었다. 연근버섯밥은 김상인 작가의 합에 고이 담겼는데 뚜껑을 여는 순간은 손님들에게 천진한 설렘을 선사했다. 평소 일상다반사의 다식과 반상 메뉴도 이 합에 담아 내는데 감탄이 쏟아진다.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찻잔에 내준 유자병차는 유자 껍질 속에 우전을 넣고 발효시킨 차로 유자향이 그윽했다. 유자병차와 함께 나온 3가지 디저트 무전, 생란, 들깨 강정이 굽이 있는 소반 모양 접시에 차려냈다. 소반을 본 따 빚은 접시에 올려진 모습이 깜찍했다. 무전은 얇게 썬 무에 잣과 유자청을 버무린 소를 넣고 만두처럼 반으로 접은 음식으로 겨울이 떠오르는 흰 빛을 염두에 두고 준비했다는 운치 있는 설명이 여운을 더했다. 마지막 메뉴인 석류동백차 칵테일은 권은영 작가의 굽이 화려한 백자 잔에 얼음을 가득 채우고 붉은 석류 알이 듬뿍 올려졌다. 마치 남은 겨울을 만끽하는 듯 활기찬 마무리였다.
<오늘, 전통 한식을 백자에 담아내다>
전통 한식 레스토랑 오늘은 한식의 한상 차림을 코스로 풀어낸다. 계절을 담은 음식, 전통주와 와인 등 음식은 물론이고 테이블 위에 올라오는 공기와 접시, 숟가락 하나까지 품격을 생각하며 고르고, 음식이 담긴 그릇을 내려 놓고 물을 따르는 서비스에도 고요히 대접하는 우리의 고유 문화를 담고자 한다. 오늘이 선사하는 것은 비단 음식만이 아닌 것이다. 이 설명을 듣고 나면 레스토랑 입구에 전시 코너가 지닌 의도와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그간 우리의 숟가락, 도자기, 전통 문양을 재해석한 패브릭 등을 전시했고, 2018년 전시는 이기조 작가의 백자로 시작한다. ‘여백에 담는 오늘의 풍류’라는 제목을 붙인 백자 전시와 함께 레스토랑 오늘의 테이블에도 백자를 올린다. 풍요롭고 생생한 시간을 경험하는 ‘오늘’을 추구하는 레스토랑의 모토처럼 백자의 가치를 경험하고 누리도록 하려는 의도다.
굽 그릇을 활용한 차림
*레스토랑 오늘의 백자는 모두 이기조 작가 작품
애피타이저 옥수수죽은 고운 누비 무늬의 합에 담겨 따끈하게 대접한다. 원형과 사각의 전접시에 꼬리찜, 삼겹살찜, 황태구이 등 다양한 메인 요리를 담아 낸다. 손님들은 사발에 담아낸 꼬막비빔밥과 동치미국수를 맛보며 백자 사발의 우아한 미감을 함께 맛보고, 갓 지은 흰 밥을 담긴 백자 공기에서 희디 흰 것들이 어우러진 은근한 멋을 느낀다. 다양한 음식을 담아낸 전접시를 보며 쓰임이 좋은 접시임을 눈치챌 수 있다. 굽 그릇에 담아낸 쌈채소와 제육볶음, 막걸리의 신선한 차람새는 백자를 쓰는 유연한 방법을 넌지시 알게 한다. 레스토랑 오늘에서 경험하는 이런 시간은 우리의 문화를 생동감 있게 전하고 일상에 스미게 한다.